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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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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수 칼럼] 스트롱맨, 우리 정치의 슬픈 현실

당신은 어떤 지도자를 바라는가? 대통령이나 지자체장 선거에서부터 아파트 동대표나 반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 주권자로서 선거를 치를 때면 언제나 우리는 지도자의 자격, 지도자의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집단의 방향 전체를 송두리째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질문은 개인들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 전반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의 상에 따라 각 개인이 원하는 지도자의 상이 바뀌기 때문에, 지도자의 모습 내지는 지도자 후보의 모습은 반드시 그 집단의 성질을 반영한다. 부패의 온상이 된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강직하고 도덕적인 이미지의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시대의 변화와 보수 정치에 대한 환멸은 30대 젊은 보수당 대표의 등판을 도왔다. 그렇기에 선거판 분석은 단순한 선거 결과 예측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거판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 사회 기저에 숨어 있는, 사회의 결핍과 욕망을 바라보는 일이다.

흔히 많은 사람이 이번 대선을 ‘사상 최악의 대선’이라고 부른다. 이전의 선거와 지금의 선거를 비교하며 현실을 자조하는 일은 언론들의 주 콘텐츠기에 별 관심은 없다. 그러나 모든 주요 후보들의 호감도가 비호감도보다 현저히 낮은 선거, 모든 주요 후보가 도덕성과 인성 논란에 휘말려 있는 선거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막말과 쌍욕이 싸우면 막말이 이긴다는 둥, 토건 세력을 숙청하겠다는 둥,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표현들이 난무하는 모습에 많은 국민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표현의 원흉인 정치인들의 지지세는 더욱 견고해져 간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글을 통해, 주제넘게 이 지도자 후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듣기만 해도 거북함과 불쾌함이 느껴지는 이번 대선은, 도대체 우리 사회의 어떤 결핍, 우리 국민들의 어떤 열망을 반영하는 것인가.

우선 더불어민주당부터 알아보자. 현재 민주당의 후보로 확정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경선의 극 초반부터 최종 후보가 될 것이라 점쳐지고 있었다. 그는 경선의 진행 과정에서 예상대로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며 결선투표 없이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었다. 마지막 3차 선거인단에서 처참한 성적을 거두게 되면서 찜찜함을 남겼으나, 그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재명이란 인물은 오래전부터 과격한 성품을 보여 왔던 사람이다. 그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헛소리하는 정신병자’, ‘벌레’와 같은 높은 수위의 표현을 트위터를 통해 아무렇지 않게 던지곤 했다. 의회의 자료 제출이나 출석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고, 절차도 곧잘 파괴하기에, 같은 당 의원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도의회마저도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특유의 저돌성은 95%를 상회하는 높은 공약 이행률을 달성해냈고, 기본소득을 비롯한 선명한 공약은 그의 시그니처로서 굳게 자리 잡았다. 결국 그는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당돌한 슬로건과 함께 민주당의 대선 후보 자리에 올랐다.

국민의힘의 1, 2위 후보를 다투고 있는 윤석열과 홍준표 또한 결코 품위와 도덕성을 기대할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윤석열 후보는 지금도 온갖 비리 및 범법행위 의혹들에 시달리고 있다. 미신이나 무당에 의존한다는 가십, 이제는 그 숫자를 셀 수도 없는 막말 논란들은 여전히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의 서슬 퍼런 칼에도 반기를 드는 용기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털어버리는 우직함으로, 그는 정치인이 되기 전부터 수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여러 차례의 좌천과 추미애 장관과의 갈등 등의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을 굽히지 않고 현실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홍준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경남지사 시절, 그는 진주의료원 폐쇄와 무상급식 중단 등의 과격한 행정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 대표를 하면서도 최고위원을 향해 성희롱을 하고, 과한 폭탄 발언을 터뜨려 당내 지방선거 후보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특유의 솔직함과 사이다 같은 발언들은 많은 국민들을 속 시원하게 했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소신 있게 뱉는 말들은 그의 인간적 매력을 증가시켰다. 2017 대선 토론 클립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수많은 청년 남성들이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기도 했다.

누구보다 서로를 강하게 물어뜯는 3인이지만, 공교롭게도 세 명은 어떤 측면에서 매우 닮아 있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정한 건 밀고 나가고, 다소 과격한 방법이나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높은 실행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상당히 유사하다. 한 단어로 축약해서 말하면, 그들은 소위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스트롱맨’의 전형이다.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으며, 좌중을 휘어잡는 압도적 리더십으로 우직하게 위기를 돌파하는, 돌격형 리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외국의 스트롱맨들을 보면서 야유와 우려를 보냈다. 두테르테 대통령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트럼프 대통령을 보며 미국 민주주의를 얕보고, 푸틴 대통령을 보며 러시아를 두려워했으며, 김정은 위원장을 보며 분노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우리 사회도 그 야유와 우려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게 되었다. 세 명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는 스트롱맨의 대한민국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스트롱맨을 바라는가? 이는 우리의 불안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집값, 더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사회적 갈등, 예측 불가능한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에서, 우리 사회는 한발 뒤로 물러나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 다양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선명한 화법으로 국민들을 안심 시켜 줄 수 있는, 확고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따라서 스트롱맨 정치의 출현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적신호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붙잡을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슬픈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스트롱맨은 그런 불안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강하게 말하고, 화끈하게 공약하고, ‘나를 따르라’고 자신감 있게 외치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스트롱맨 정치를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처럼, 스트롱맨은 스스로 자신하는 만큼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스트롱맨 정치는 어떠한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불안정과 갈등을 심각한 수준까지 심화시킬 수 있다.

스트롱맨은 기본적으로 ‘절차적인 정당성’을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행정 운영 과정에서 끊임없이 의회를 패싱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이재명 지사나, 긴급재정명령권으로 법적 절차를 건너뛰고 노조를 때려잡겠다는 홍준표 후보의 모습은 이런 경향의 단면이다. 이렇게 절차적 정당성을 가벼이 하는 태도는 우리 민주주의가 지켜왔던 사회 보호 장치들을 파괴한다. 협의와 숙의는 사라지고,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아이디어들이 쉽게 현실로 집행된다.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무시되는 과정에서 일이 훨씬 위험하게 진행되거나,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이러한 기조는 협상과 협의를 간과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의회는 합의와 숙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정부를 위한 거수기나 정부의 발목만을 잡는 기관으로 전락한다. 여러 사회단체들을 필두로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들은 서로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사회에 대한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사회는 각 분야별로 두 개의 대립하는 집단으로 찢겨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렇게 사회는 점점 회복 불가능한 사태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정치는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협의와 합의의 기능이 상실된 사회는 반대편의 극렬한 반대를 부르기 때문이다. 강력한 리더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고자 해도,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절대로 반대파의 협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여전히 반대파의 찬성을 이끌어야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리더는 아주 쉽게 손발이 묶인 상태가 된다. 스트롱맨은 문제 해결을 강력하게 자신하지만, 정작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곧 문제를 풀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부상한 스트롱맨 정치를 우리 사회를 향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 스트롱맨이 아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를 돌아보고 통렬한 반성을 해야만 한다. 스트롱맨 정치의 출현은 반대로 말하면, 스트롱맨이 아닌 정치인들이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물들어 문제 해결을 게을리한 건 아닌지, 안일함과 매너리즘에 빠져 자신의 해법을 선명히 제시하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일반 국민들은 역으로, 스트롱맨이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할 해법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정치인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기 전에 정치인을 어떤 이유로 지지해야 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스트롱맨 정치라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우리 사회의 불길한 아우성을 포착하고, 신뢰의 회복과 갈등의 봉합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운동이 등장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때 스트롱맨 정치에 열광했던 미국은 트럼프 경험 4년 후, 바이든을 선택해 전통적 미국을 되찾았다. 우리나라도 곧, 그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스트롱맨 정치의 심화가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까지 부숴놓기 전에, 우리도 건강한 시민의 힘을 통해 스트롱맨 정치를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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